국내 국악의 시원 제천 청풍…악성 우륵 ‘제천人’ 고착화 시급
1893년 최치순 등 33인이 모여 청풍승평계 조직
1950년까지 지속, 6·25전쟁으로 악단 해체 비운
우리나라 최고(最古) 국악예술단체인 청풍승평계 131주년 기념으로 난계국악단을 초청, 공연이 열린다. 영동군립난계국악단은 난계 박연선생의 예술적 혼과 음악적 업적을 계승·발전시키고, 국악의 고장인 영동의 문화예술사절로서 영동군을 국내외에 알리며 국악을 전파하고자 설립·운영되고 있다. 지난 1991년 5월18일 창단하고, 그해 10월 창단연주회를 가졌다. 지난 2011년 6월월 서울 국립국악원에서 창단 20주년 기념 특별 공연으로 ‘비상’을 무대에 올렸다.
제천문화원은 1일 제천예술의 전당에서 난계국악단 초청 공연 ‘우리 소리, 세계의 울림’ 주제로 공연을 한다. 공연은 바리톤 길경호, 해금 강은일, 판소리 정윤형, 타악그룹 판타지 등 동·서양 최고 음악가들의 무대를 볼 수 있다.
국악단은 조원행 작곡 ‘청연’을 흐르는 물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우리 악기 선(線)의 아름다움을 국악 관현악으로 표현한다. 지난 2014년 제8회 강원도 화천 비목 콩쿠르 창작 가곡 부문 1위를 수상한 바리톤 길경호는 ‘마중’과 ‘거문도뱃노래’를 들려준다. 강은일 명인의 해금 협주곡 ‘추상’, 소리꾼 정윤형의 판소리 적벽가 ‘자룡 만경창파를 가르다’, 타악그룹 판타지의 사물놀이 협주곡 ‘신모듬’ 등의 무대가 이어진다. 무료 공연이지만 제천문화원과 제천예술의 전당에서 관람권을 받아야 선착순 입장할 수 있다.
‘청풍승평계(淸風昇平稧)’는 국내 최초의 국악단이다. 모든 국악기가 동원, 합주를 했다. 작금의 오케스트라와 유사한 개념이다. 청풍승평계는 제천 청풍 출신인 악성 우륵의 정신을 이어갈 목적으로 지난 1893년 청풍지역에서 창단했다. 1965년 박효관이 창단한 서울시 국악관현악단인 보다 72년 앞선다.
청풍승평계(淸風昇平稧)는 가야금·산조 가야금·거문고·현악·향피리·대금·장고 등을 갖춘 당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국악 단체였다. 이들은 청풍 한벽루에 모여 연습을 했다. 단원 연습실과 악기·악보 등은 충주댐 건설로 인한 수몰로 대부분 물에 잠긴 상태다. 제천문화원은 지난 2022년 10월 학술세미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청풍승평계(1893년)·속수승평계(1918년) 소속 단원인 이태흥(李泰興·1871~1940년)의 증손녀인 이화연(여·67) 선생이 나와 구술·고증했다. 노재명 국악음반박물관 관장, 주재근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김성우 국·공립 예술단 국악지휘자 협회 사무국장 등 전문가들과 언론계 인사들이 참석해 토론을 벌였다. 같은해 12월에는 청풍승평계와 관련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고 발표되기도 했다.
제천시 청풍면 읍하리에 128년 전 실존했던 청풍승평계 연습실은 지금 물에 잠겨 그 실체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발굴한 옛 문서 등을 기반으로 제천이 예악과 국악의 본향임이 조명되고 있다. ‘청풍승평계’는 악성 우륵과 떼어낼 수 없다. 현재 청풍면 물태리 출신인 우륵은 국내 국악의 시조와 다름이 없다. 우륵은 흔적은 제천과 청풍지역 곳곳에 남겨져 있다. 대표적인 유적이 의림지이다. 우륵은 의림지에서 생활을 하며 음률을 논했다. 의림지에는 우륵정과 우륵당 등이 남아있다.
청풍승평계의 규약은 33명의 율원(단원)이 매달 16일에 회합 연주회를 열었다. 가야금과 양금·현금(玄琴)·당비파·향비파·피리·젓대·단소·장고 등을 교련했다. 단원들은 각 10냥씩 갹출, 악기를 구입하고 수리했다. 청풍승평계의 좌목(座目)으로 총책임자 수좌(首座)는 연장자로 했다. 통집(統執)은 주장으로 규칙을 담당했다. 교독(敎督)은 기악(妓樂)과 가무(歌舞)의 조련교습을 총감독했다. 총율은 율원 가운데 최고 능숙한 사람이 맡았다. 수주찰(首周察)은 대소 사무와 재물을 맡았다. 부주찰은 수주찰이 위임하는 일을 했다. 상영사(上領司)는 재덕과 풍소(風騷)에 숙련자가 연회를 총찰했다. 부영사는 상영사가 위임하는 일을 했다. 율원의 자격은 지역 출신자로 제한했다. 그 후손은 대대로 계승할 수 있도록 규약을 엄격하게 제정, 우륵의 예맥이 전승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다. 일제 치하에서도 율원을 확충하여 지속적인 발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50년 6·25전쟁으로 악단이 해체되는 비운으로 말미암아 관현악(管絃樂)을 연주하던 506율의 악보와 악기조차 유실됐다.
◇대악(大樂) 모태 발전시킨 국악 발상지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응청각 주련은 “가을 맑은 달밤에 가야금 타던 집(秋夜淸琴月一堂)”이라고 나타나 있어, 수천 년 억겁의 세월이 흘렀어도 우륵의 청아한 가야금 선율이 들리는 듯 하다. 호서읍지는 “청음정(淸音亭)은 관수헌의 동쪽에 있다(淸音亭在觀水軒東)”고 기록돼 있다. 청음정의 명칭은 청풍지역의 음악성을 대변하고 잇다. 신라 진흥왕은 청풍강 유역을 순수하면서 우륵의 가야금 탄주를 들었다. 우륵이 진흥왕 앞에서 탄주한 것이 청풍체 하림조이다. 이를 계승한 것이 청풍승평계이다. 이를 통해 국악의 발상지가 우륵이 탄생하고 거주했던 제천·청풍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재에 들어 제천과 청풍 그 어느 곳에도 국악과 관련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국악의 발상지 제천’의 버팀목이 돼야 할 악성 우륵에 대한 지역적 고찰도 부족하다. 악성 우륵이 연주한 가야금의 12현은 수리 문화에 부합하는 농경세시 풍속의 율려이다. 악성 우륵과 국악·농경문화의 발상지인 제천의 정체성 수립의 시급성이 지적되고 있는 대목이다. /최경옥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