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문화 정체성조차 마련되지 않아…외지출신 의병장 우상화 전략 수정해야
자양영당·의병 격전지 등 관리 부실, ‘의병도시 제천’ 시정방침 어불성설
이근규 제천시장이 시정 기치로 내건 ‘제천의병(호좌의병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첫 단추부터 다시 잘 끼워야 할 것으로 지적됐다. 시는 ‘창의 제천의병’을 주창하고 구한말 제천지역을 의병의 메카로 단정하고 있으나 대외적 정체성 확립과 정당한 가치를 받지 못하고 있다. 시는 제천지역의 곳곳을 의병관련 유적지로 지정·관리하고 있으나 부실운영으로 대책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제천의병은 유인석 등 화서학파 유림 중심의 ‘을미의병(1895년)’과 이강년 중심의 ‘정미의병(1907년)’으로 크게 구분된다. ‘을미의병’은 단발령과 명성황후인 민비를 일제가 시해한 사건이 직접적 도화선이 됐다. 사실상 전국 최초의 체계화된 구한말 의병이다.
‘정미의병’에 앞서 ‘을미의병’ 호좌의진의 맹장이었던 원용팔과 정운경 등이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이에 격분, 봉기한 ‘을사의병’이 있다. ‘을사의병’은 거병과 동시에 일제에 의해 진압돼 ‘을미의병’·‘정미의병’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구한말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역사적 시점과 ‘창의 의병’이 행보를 같이하고 있는 곳은 전국에서 제천지역이 유일하다.
창의(倡義)는 국난(國難)을 당했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일념으로 의병(義兵)을 일으킴을 의미한다. 그러나 최근 전국의 일부 지자체들이 구한말의 ‘의병활동’을 대대적으로 발굴, 브랜드화하고 해당 지역 시·군민들의 정신적 기틀로 삼기하기 위해 행정력을 기울이면서 의병의 메카인 제천지역의 위상이 크게 위협을 받고 있다.
최근 구한말 일제에 항거한 의병활동의 역사적 사실을 전면에 배치하고 있는 지자체는 줄잡아 30곳이 넘고 있다. 구한말 의병활동은 제천을 중심으로 충북 북부지역과 강원도 남부지역, 경상도 북부지역을 아우르는 호좌의진과 경기도 강화·연천·포천·여주·이천·강화, 최익현의 충남 청양을 중심으로 한 공주·회덕·논산·진잠, 전라도 장성·나주·함평·무주·임실, 강원도 춘천·원주 등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부지기수이다. 이들 지자체는 해당 지자체 중심의 의병활동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고 브랜드화에 진력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제천시는 기존의 틀에 박힌 관념으로 ‘제천의병’에 접근, 상대적 경쟁력을 잃고 있다. 실제로 그동안 ‘제천의병’은 화서학파 중심의 ‘을미의병’에 초점을 두고 대대적 지원을 아끼기 않았다. 시는 ‘창의 제천의병’으로 기치를 내걸어 마치 을미년 제천지역에서 봉기한 의병이 전국으로부터 처음이고, 이를 도화선으로 전국 의병이 일어난 것처럼 인식화했다. 이의 중심에는 유인석 의병장을 내세웠다.
이로 인해 ‘제천의병’은 곧 ‘유인석 의병’으로 고착화했다. 그러나 유인석과 관련, 제천지역에 남아있는 유적은 그가 후학을 가르쳤던 ‘자양영당’ 이외에 별반 내세울 것이 없다. 그의 묘는 춘천시에 있다. 유인석 의병장의 탄생지인 춘천시는 ‘유인석 의병장 영모제’를 열고 있다. 제천시가 매년 열고 있는 ‘제천의병제’보다 규모가 훨씬 크고 짜임새가 훨씬 탄탄하다. 사실적으로 ‘자양영당’에서 제천의병이 봉기하기 앞서 원주 등지에서 우선했다. 제천의병을 새롭게 조명해야하는 대목이다.
유인석과 함께 제천의병을 이끈 대표적 인물인 이강년의 묘역은 상주시에 있다. 봉양읍 까치성 전투에서 순국한 이강년 의병장의 묘역은 당초 제천지역에 있었으나 후손들의 요구로 상주시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강년 의병장의 탄생지인 문경시는 묘지 이장을 위해 상주시와 수년째 시비를 벌이고 있다.
이밖에도 한때 50기에 달했던 구한말 의병장들의 묘역이 문중으로부터 이장돼 제천지역에 남아 있는 것은 20여기에 불과하다. 그나마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채 제천지역의 산야에 방치돼 있다.
지역의 의병유적지 관리·보존실태도 부실하다. ‘을미의병’의 유적지로 국사교과서에도 나오고 있는 남산(정봉산) 전투현장은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제천의병은 1896년(고종 33) 2월17일에 충주성을 함락하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가흥과 수안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와 관군의 공세로 3월5일 충주성을 빼앗기고 다시 제천으로 후퇴했다.
의병은 화산동 남산에 주둔하면서 현재의 중앙동 중앙공원 아후산(衙後山)에 지휘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에 의병의 방어선은 점차 밀렸다. 5월25일에는 근거지인 남산에서 최후의 방어전을 벌였다. 이 남산 전투에서 중군장 안승우(32)와 종사관 홍사구(18)를 비롯하여 수많은 의병들이 순국했다. 남산 의병격전지는 공원으로 조성돼 생뚱맞게 체력단련시설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입구조차 찾기 어렵다. 국내 의병의 성지인 ‘자양영당’의 관리도 부실하다.
자양영당 초입의 홍살문은 심하게 파손된 채 방치돼 있다. 이곳은 잔디 등이 식재돼 있지 않아 우천시 수렁을 방불케 한다. 의병전시관은 신발에 묻어온 흙들로 인해 신성감이 훼손된다. 유인석 의병장이 거주했던 주택은 별도로 떨어진 채 찾기 어렵게 숨겨져 있어 관람객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고 있다.
시민 최모(53·의림동)씨는 “마치 제천의병이 전국 최고인냥 과대포장하고 있으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속빈 강정에 불과하다”라며 “의병의 성지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서 ‘의병의 고장 제천’이니 ‘의병광장 조성’이니 하는 것은 마치 모래성을 쌓은 것과 같다”고 일침했다.
/최경옥기자
제천교육청 테니스장을 매입하고 제천의병 관련 테마가 있는 곳으로 개발돼야 한다.
역사도 이제는 경쟁력이다. 제천이 의병의 고장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내실이 있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동안 쌓아왔던 의병제마져도 우습게망가트려놓고
지역은 갈가리찢어지고 혼란만가중시킨일 외엔 한것이없다 앞으로 다가올 책임추궁엔 또머라고 썰을풀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