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종합정비계획 진입로 연계 탐방 동선 등 정비
충북개발공사는 도 지정기념물인 지천 최명길(1586~1647) 선생과 그의 손자인 최석정(1646~1715) 선생의 묘소 정비를 했다. 김영환 지사는 최명길·석정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정비현황을 점검했다.
지천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양명학자·외교관·정치가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완성군(完城君)에 봉작되었다가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으로 진봉됐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문과에 급제, 관직에 올랐다. 젊은 나이에 요직을 두루 거쳤다. 광해군의 정치에 반발,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군됐다. 정묘호란 당시 화의론을 펼쳤다. 항복이 결정된 후 항복문서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후 청나라와의 협상을 성사시켜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대명, 대청 외교를 맡고 개혁을 추진하면서 국정을 주도했다.병자호란 때는 청나라군 선봉장을 만나 시간을 끌어 인조의 남한산성 피신 시간을 벌었다. 그 뒤 화의와 항전을 놓고 김상헌 등의 척화신에 맞서 화의론을 주장했다. 이때 직접 항복문서를 지었는데, 척화신 김상헌이 이를 찢고 통곡하자 항복문서를 다시 모았다. 병자·정묘호란 당시 주화론(主和論)을 주장, 화의가 끝나 청나라군이 돌아간 후 많은 지탄을 받았다. 당시 청나라와의 화의론을 주장하여 주전론을 주장하던 청음 김상헌·선원 김상용 등과 맞섰다. 두 번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다.
지천 선생의 손자인 석정 선생은 서인의 일원이었으나 김익훈·김석주의 역모 날조 사건에 반대하여 서인의 분당 시 소론이 되었다. 또한 1694년부터 제한적이지만 남인을 등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1680년(숙종 6년) 보사원종공신 1등(保社原從功臣一等)에,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조참판·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대제학을 하다가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공사 등에 따르면 올해 지역이 잊혀진 위인을 발굴해 지원하는 프로젝트에 나서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있는 최명길·석정 선생의 묘소 벌초와 함께 주변 진입로를 정비했다. 최석정 선생 묘소에는 표지판을 설치하고, 선생의 업적을 설치한 안내판도 세웠다. 김 지사는 두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지역 정체성 확립을 위해 묘소를 참배하고 정비사업 내용을 점검했다. 김 지사는 “청주 최명길·최석정 묘소는 도 지정 문화유산으로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해 진입로와 연계 탐방 동선 등을 연차적으로 정비할 계획”이라며 “앞으로도 지역 정체성 확립과 도민 자긍심을 높일 수 있도록 문화유산 가치를 밝혀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최경옥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