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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이 낳은 독립운동가 안중근과 천단 직접참여
‘꽃으로 피어 바람이 되어 떠나다…’
채가구역서 준비…실행은 하얼빈역 안 의사가
제대로 조명조차 역사 속 잊어져 아쉬움 남아
2020년 경자년(庚子年)은 12지(支) 중 첫 번째인 쥐의 해다. 육십간지의 37번째이다. 경(庚)은 색상으로는 흰색이어서 ‘하얀 쥐의 해’다. 쥐의 해에 태어난 제천지역의 대표적 인물로 단연 항일운동가 우덕순(禹德淳·1876~1950)이 있다.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국권침탈의 원흉인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는 안중근이 쏜 총탄에 절명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의 주역이 안중근이지만, 이 거사에는 숨은 주역이 있다. 제천지역 출신인 우덕순(禹德淳·1876~1950)이다.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哈爾濱)역 앞 동쪽에는 철제문이 있다. 철제문을 들어서면 건물 외벽에 걸려 있는 시계가 눈에 띈다. 이 시계는 1년 내내 ‘9시30’에 멈춰있다. 1909년 10월26일 같은 시각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 바로 그 자리에서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했다. 세월은 흘러 이곳 1등석 승객 대기실은 허물어지고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지어졌다. 지난 2013년 6월 한·중 정상회담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習近平) 주석에게 “안 의사 의거현장에 기념표지석을 설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중국 정부는 이에 대한 화답으로 표지석을 만들면서 기념관도 지었다. 실로 안 의사가 서거한지 105년 만이다. 안 의사 기념관은 하얼빈역이 새로 지어지고 이전하면서 존폐의 위기에 맞고 있다.
대한민국의 최고 기념일인 8월15일 광복절이 되면 반드시 기억되는 인물이 바로 안중근 의사이다. 광복절을 전·후, 온통 안 의사의 순고한 희생을 곱씹는데 시간이 부족할 정도이다. 그러나 한켠에 제천지역 출신인 우덕순(일명 연준·連俊) 우국열사가 점차 이름조차 잊혀져가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동양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하여 안 의사에게는 쌍둥이와 같은 또 다른 동지 우 열사가 마지막까지 옆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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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열사는 청풍면 황석리 출신이다. 그는 9살 때 부친상을 당했다. 모친인 윤씨 슬하에서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공부했다. 그는 24세에 서울로 상경, 동대문 근처에서 잡화상을 하다가 만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연초(담배) 행상을 했다. 그곳의 교민들이 중심이 되어 주 2회 발행하는 항일 운동지인 ‘대동공보(大東公報’의 집금 회계원으로도 일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32세가 되면 1908년 우 열사는 300명의 정예 용사와 함께 국내에 잠입, 함경북도 경흥·회령 일대의 일본 군영을 습격·교전하다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는다. 함흥 감옥에서 복역 중 탈출한 우 열사는 이듬해 봄 노우키에프스크(연추, 煙秋)에서 안중근·김기열 등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고 결사보국을 다짐한다. 그해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다시 안중근을 만나 국권피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는 거사에 동참한다. 거사 직전, 두 사람에게 거사자금과 권총을 건네 준 사람은 유진율과 이강이라는 동지였다. 이때 유·이 두 사람이 “지금 삼천리강산을 너희가 등에 지고 간다”하고는 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고 우덕순은 회고록에서 말한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3가지 계획을 세우고 결의했다. 첫 번째는 가장 먼저 이토 히로부미를 반드시 저격할 것, 두 번째는 총을 쏘고 나서는 그 자리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를 것, 세 번째는 될 수 있는 대로 스스로 생포되어서 억울한 사정을 외국에 선전할 것 등을 결의한다.
하얼빈역에서 세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는 채가구(蔡家溝)라는 기차역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는 채가구역을 거쳐 하얼빈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하얼빈역의 경비가 강화되자 실패의 확률을 줄이기 위해 안 의사는 채가구역을, 우 열사는 하얼빈역을 저격 장소로 설정했다. 다음날 안 의사는 갑자기 계획을 변경, 자기가 하얼빈을 맡겠다고 고집해 서로의 거사 장소가 바뀌게 된다. 그러나 운명은 안 의사 쪽으로 향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는 채가구역을 지나쳐 하얼빈역에 정차한다. 이로 인해 우 의사는 저격의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 우 의사의 저격 계획도 곧바로 발각된다. 경비를 맡은 러시아 군인들은 우 열사가 투숙했던 여관의 문을 밖으로부터 걸어 잠갔다. 이토 히로부미의 경호 차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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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가 안 의사의 총을 맞고 사망하고, 3시간 후 러시아 군인 수백명은 우 열사가 투숙했던 여관을 수색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소. 나머지 수상한 조선 사람(우 열사)을 잡으라는 지령이 내려 졌오”라고. 러시아 군인들로부터 저격 성공사실을 알게된 우 의사는 그 자리에서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몇 번이고 외쳤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혐의로 뤼순감옥에서 사형을 당한 안 의사의 시신을 처음 대한 것도 우덕순이었다. 일본 교도관은 함께 수감된 우덕순을 불러서 “오늘 아침 10시에 안중근은 하늘나라로 올라갔소. 영결식이나 하라고 불렀소”라고 말한다. 우덕순이 안 의사 얼굴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하였으나 “교수형으로 죽었으니 얼굴 모양이 대단히 흉하다”라며 끝내 시신은 보여주지 않았다. 110년 전인 1910년 3월26일이다.
러시아 군인들에게 체포돼 일본에 넘겨진 우덕순은 안 의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도 3년간 옥고를 더 치렀다. 우 열사의 독립운동은 출옥 후에도 지속된다. 우 열사는 하얼빈·치치하르·만주리 등지에서 교육·종교·언론사업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 해방이 되자 헤이룽장 성(黑龍江省)의 한인민단 위원장으로 아들 우대영과 함께 동포 피난민의 본국 수송에 진력했다. 귀국 후에는 건국 사업에 이바지하다가 동란 중인 1950년 9월26일, 서울 수복 이틀을 앞두고 인민군에게 잡혀 처형됐다. 정부는 1962년 우덕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최경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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